부처님 열반에 대하여


음력 2월 15일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입멸하신 열반일(涅槃日)입니다. 이 날은 4월 초파일의 부처님 탄생일과 2월 8일의 출가일 12월 8일 성도일(成道日)과 같이 불교에서 기념하는 중대한 4대 명절의 하나입니다.

그러면 열반이란 어떤것입니까. 이제 그 열반의 개념에 대하여 세상에는 퍽 오해가 돼 있는것 같으니 불자는 물론이요 소위 불교의 전문가라고 하는 분들에게까지도 옳게 인식되어 있지 않은 경향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열반이라는 것은 사람이 살다가 죽는것이다>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 대다수입니다. 2월 15일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돌아가신날을 <열반일>이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얼핏 그렇게 이해할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보아집니다. 그러나 그러한 의미가 전혀 없는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열반의 바른 뜻은 아닙니다. 사람이 죽는 것을 열반이라고 하는데 이는 있던 것이 없어진 것을 열반이라고 하는 것이니 이렇게 볼 때 사람이 죽는 것을 열반이라고 하는것도 무방하다 하겠습니다. 대승경전에서는 죽는 것을 열반이라고 써오기도 했는데 사실 불어 끈다(吸滅)는 열반의 원어(原語)를 가지고 인간이 죽는 것을 열반이라고 알고 있음은 잘못입니다.

그러면 열반이라는 원어는 과연 그 뜻이 무엇인가. 원시경전에 있어서 석가모니 부처님은 우리가 살다 죽는 것을 열반이라고 한데는 거의 없습니다. 보통 들어난 말로 현증열반(現證涅槃)이라고 해서 현재 살아 있으면서 열반을 증득하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즉 <나는 본래 무엇을 구하여 출가 하였느냐 하면 무고안온(無苦安穩)의 열반을 증득(證得)하기를 구함이었는데 그대와 내가 이제 이것을 증득했노라>고 했으니 죽는다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뒤에 죽음을 열반이라고 함은 잘못입니다. 대승경전에서 죽음을 열반이라고 했으나 본의(本義)는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불어끈다><욕망을 없앤다>는 것이 열반의 본 뜻인데 불어서 끈다는 것도 모든 번뇌 망상심을 불어서 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눈을 감든지 뜨든지 여러 가지 생각 즉 번뇌 망상이 쉴새 없이 일어나는데 이러한 불을 끄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체망상의 근본은 무엇이냐 하면 탐욕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탐욕은 세간을 얽어맨다>고 하시었습니다. 그러나 인간 생활은 욕망이 없이는 구성이 안되는 것이니 그런 의미에서는 욕망이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회나 국가가 다만 이기적 욕망만을 쫓는다면 망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교의 목표는 일체 탐욕심을 없애야 하는 것이니 그것이 곧 열반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오근(五根)을 통해서 들어오는 욕심을 없애는 것이 열반입니다. 그것을 조금 넓혀서 다시 말하면 탐애심이 길이 다하고 진애심이 깊이 길하고 우치심이 길이 다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우리 범부중생들은 항상 어리석은 마음이 그대로 있어서 항상 맹동(盲動)하는 것입니다.
독일의 산펜하우이가 말한 맹목적 의지(盲目的 의지)라고 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목적없이 움직이는 것을 그대로 버려두면 엉뚱한데로 끌고 가는 것인데 이것을 무명(無明)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탐진치(貪瞋癡)를 부처님께서는 삼독심(三毒心)이라고 했습니다. 모든 번뇌 가운데 가장 기본적 중심적인 것이 이 삼독심이니 이 삼독심을 없앤 것을 열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삼독에 의해 사는데 그대로 두면 앞길을 망치므로 이것을 항상 비판하고 조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아주 제거하기는 실로 힘든것입니다. 불교의 수행에 견도(見道)수도(修道)가 있습니다. 견도라는 것은 도리(道理)를 본다. 좋지 못한 도리를 안다는 뜻이니 이렇듯 도리를 아는 것은 쉬우나 수도는 대단히 어렵습니다. 아는 것은 쉬우나 삼독은 오래 걸려 끊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삼아승지겁(三阿僧祗劫)이나 걸려서 하는 것입니다. 도리어 알더라도 수도하기는 실로 어렵습니다. 이와같이 일체의 망상심을 제거한 것이 열반입니다. 타는 불을 끄고 있는 것을 없애는 것이 열반입니다. 삼독의 불이 우리 신심(身心)을 태워 없애므로 이 불을 끄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성도하신 뒤 설법하심에 첫 번째가 팔정도(八正道) 두 번째가 무아(無我)세번째가 사성(四聖) 네 번째가 설법이 치연경(熾撚經)입니다. 이는 성도(成道)하신 후 세사람 내지 열사람이 이렇게 교단을 이끌어 삼형제 가섭(迦葉)의 일천명을 교화한뒤 첫 설법이 치연경이니 그 요지(要旨)는 <너의 마음 가운데에나 중생의 마음 가운데도 항상 불이 타고 있다. 욕심이 눈을 통해 들어오고 귀, 코등의 육근(六根)을 통해 들어와서 불이 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보고 들은 다음에는 그냥 무심하지 못하고 욕심의 불이 탑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번뇌를 그냥 두어서는 우리는 범부생활을 계속 하므로 부처님은 이 불을 끄라고 하시었습니다. 이것이 열반입니다. 이와 같이 불교의 목적은 열반을 증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죽는 것이 목적이라고는 할 수 없을것입니다.

그러면 현증열반(現證涅槃)이라는 것은 어떠한 것이냐 하면 유교에서 말하는 극기(克己)가 그것입니다. 자기를 이긴다는 것은 번뇌 망상심(煩惱 妄想心)을 이긴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힘으로는 상대방을 타도하기는 쉬워도 마음속의 번뇌는 이기지 못합니다. 즉 상대방을 타도한다는 것은 自身이 제 마음에게 진 것입니다. 남을 상대해서 이겼다고 생각하나 뒤에는 후회하는 것이니 이는 자기가 身心에 진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불교의 목적은 열반을 증득하는 것 즉 도를 깨닫는 것인데 이 道라는 것은 밖에 있는 것도 아니고 없던 것을 새로 얻는것도 아닙니다. 또한 오도(悟道)는 신비(神泌)도 아닙니다. 도를 밖에서 새로 얻거나 신비한 것으로 아는 것은 외도(外道)들의 생각입니다. 도라는 것은 곧 자기가 자기를 찾아 자기의 자유를 얻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유를 얻지 못하는 것은 망상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불교에서는 108번뇌 내지 8만 4천의 번뇌를 말하는데 이러한 번뇌 망상이 잔잔한 우리 마음을 번요뇌란하는 것이니 이것을 제거하면 자기가 자기를 이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본심(本心)은 무엇이겠습니까? 불교에서는 이렇게 비유합니다. 즉 공중의 15夜밝은 달과 같다고 합니다. 우리는 초생달, 여드레, 보름달이라고 달리 이름하지만 그러나 달(月)자체는 언제나 항상 그 모양으로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함허 스님의 말씀대로 만고에 광명이 길이 없어지지 않는 (萬古光明長不 )것입니다. 이 광명한 둥근달이 그대로 나타나서 두루하지 않는 곳이 없나니 이것은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이라고 하고 또는 파도 일지 않는 잔잔한 물과 같다고 합니다.

즉 한래한현(漢來漢現)으로서 오는대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조금도 사심없이 공정하게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것의 불교의 심성관(心性觀)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마음의 본성을 나타내지 못하는 이유는 마치 달이 차고 기우는 것이 지구나 구름의 작용에 말미암은것과 같으며 물에 물상(物象)이 비치지 못함이 바람으로 인한 파도 때문인것과도 같은 것입니다. 우리 마음도 달이나 물과 같이 이지러지고 출렁임이 없건만 객진번뇌 때문에 타고난 본성을 나타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성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자기 마음의 번뇌를 제거하는 것입니다. 즉 열반을 얻는 것이요. 오도(悟道)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불타(佛陀)입니다.

이와 같은 열반은 불교교리로서 가장 중요한 의의를 가진 것인데 이러한 교리를 찾아 잘못 이해하여 죽는것을 열반이라고 합니다. 사실 그러나 소승불교도들은 열반을 소극일면(消極一面)으로 보고 있습니다. 세상과 접촉하지 말자고 합니다. 그래서 열반을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는 것이니 유여열반(有餘涅槃)과 무여열반(無餘涅槃)이 그것입니다. 유여라는것은 이 몸으로는 열반을 중득한다 하더라도 육체가 있는한 다시 동요되기 쉽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번뇌를 일으킨 근본인 육체가 남아 있다는 뜻이니 이것을 유여의(有餘依)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이 육체마저 없어지는 열반은 무여, 또는 무여의(無餘依) 열반이라고 합니다.

대승불교는 무주처열반(無住處涅槃)입니다. 열반에 머물러 있지 않는 것입니다. 열반을 증(證)하는 것은 초삼계(超三界)가 아니라 마음의 자유를 얻는 것이니 몸도 자유로 처신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해서는 안 됩니다. 열반을 얻었다고 세상을 다 떠나면 어찌 되겠습니까? 이는 불교를 오해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듭 말씀드리거니와 대승불교는 무주처열반(無住處涅槃)입니다. 열반을 얻고서도 중생제도가 의무입니다. 이것이 보살의 행(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열반의 중득을 목표로 열반의 마음으로 세상을 처해야 하는 것입니다.